첸리췬(錢理群) 제1강


지난 수요일 저녁 첸리췬 첫 강의가 있었고, 의외의 인파가 몰려들어 강의실은 빈 좌석 없이 앞과 뒤의 빈 공간까지 서서 듣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두 시간 정도의 강의와 한 시간 정도의 질의 응답으로 첫 수업은 마무리 되었다. 중국적 상황을 고려할 때 민감한 부분이 적지 않아 녹음을 하는 경우에도 외부 유출을 조심해 달라는 주최 측의 협조사항이 전달되기도 했다.

'대륙 전후사상상황 - 나와 공화국 그리고 마오저뚱 60년'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이번 강의는 11주 동안 첸리췬이 강의를 하고, 나머지 부분은 천꽝싱 교수가 이어서 정리하는 과정을 거친다. 간단히, 첫 날 첸리췬이 이야기한 내용의 핵심을 정리해 본다.

1. 나와 마오 그리고 마오시대와의 관계, 나는 누구인가? 나는 마오시대 최후의 한 명의 지식인이다.(루쉰은 스스로 중국 전통문화의 최후의 지식인이라고 한데서 빌어옴)

2. 마오사상과 문화의 몇 가지 기본 특징
1) 마오사상은 이미 단순한 사상형태의 범위를 초월하여, 그에 맞는 사회조직구조를 만들어내었으며, 직접적으로 민족성격, 기질에 영향을 미쳐, 일종의 문화를 형성하였다.
2) 마오문화는 중국공산당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며, 일정정도 전체 지식계를 포함하여 중국인민이 마오문화의 창조에 참여했다.
3) 마오사상은 당대 중국과 세계에 있어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세계대전, 독립민족국가,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20세기 역사와 모두 연관됨)

3. 내가 직면한 임무는 '20세기 중국경험'을 총결짓는 것이며, 20세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발전의 경험을 총결짓고, 비판의식의 재구성을 진행하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양안의 지식인들이 교류하는데 있어서의 기초이자 동시에 목표이기도 하다.

4. 나의 연구와 강의 방법론 구상
1) 현존 역사 서술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검토
공화국 60년에 대한 이야기는 세 가지 공간을 중심으로 한다. 상층의 마오, 하층의 보통민중('나'를 포함), 그리고 중간의 지식인. 이들 사이의 상호영향에 주목하고자 하는데,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의 한 특징이다.

2) 연구자 주체의 개입. 즉, "스스로를 태워 집어 넣는 것."(루쉰은 이를 현대 문학과 사상의 한 특징이라고 하였다.) 이는 동시에 마오 시대의 한 특징이기도 했다. 보통사람과 역사운동의 관계라는 점. 이는 당연히도 나의 연구목적과 연관된다. 나에게 연구는 우선적으로 자기이해와 해탈이다.

3) 역사에 대한 이해와 동정이 있어야 하며, 동시에 그 후과를 직시해야 한다. 이는 마오를 평가함에 있어서 특정한 역사 조건 하의 이론과 실천의 구체적인 사고노선를 해명해야 함을 의미. 이는 과학적으로 역사경험의 교훈을 총결짓는 것을 말함. 마오 사상이 역사적 공상 사회주의자와 가장 크게 다른 지점은 감독과 제약을 받지 않는 권력과 결합하였으며, 몇 억 인구의 운명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반드시 실천의 후과와 함께 그 사상의 실제 의의를 고찰해야 한다.

4) 이는 모순과 곤혹이 가득한 강의가 될 것이며, 한편으로는 이야기, 한편으로는 질의이고, 있는 그대로 공백을 남기어 둘 것이다. 이는 하나의 회고식 서술이며, 이는 무수한 역사의 세부적인 이야기들을 갖는다. 그리고 또 역사의 격정과 황량함을 모두 포함하게 될 것이다.

편린들...
* 이후 '중국 민간사상사'라는 저술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함.
* 사상가는 타협해서는 안되지만, 실천가는 타협하지 않아서는 안됨. 마오는 사상가이자 실천가였음.
*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워낙 강의를 잘하고 또 토론을 잘 하는 것으로 보인다.
* 1985년부터 마오사상 연구를 시작했는데, 정말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1994-1995년에 한국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상당한 연구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수 천편의 마오관련 연구물들을 독파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마오에 대해서는 명쾌하지 않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루쉰에 대해서는 매우 명쾌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다. 마오 연구가 쉽지 않은 것은 자신과 마오의 관계 자체의 복잡성 때문이라고 한다.
* 마오가 보통 1935년 준의회의에서 중공최고의 지위에 오른 것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는데, 당시 총서기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으며, 실제로 마오는 1938년 하반기에 코민테른의 인정을 받아 최고지위로 상승함. 10월 '정치보고'를 통해 정식 인정됨.

의문
* 서학 또는 서양의 자유 등의 개념들과 마오, 혁명사상 등을 대비시키는 어법이 자주 등장하는데, 마오사상 역시 공산주의 운동의 한 부분이라고 볼 경우, '서'와 대비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만약에 가능하다면, 마오가 서구 공산주의 운동 및 이념과 갖는 차이를 명확히 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서학 또는 서양의 민주/자유 등의 개념이 자유주의로 혼동되지 않으려면, 자유주의와의 차별성도 분명히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첸리췬은 서양의 자유사상과 마오의 혁명사상을 대비시키면서도 어느 한쪽도 일방적 지지를 하지는 않는다. 문혁후기에는 서양의 자유사상을 통해 마오사상을 비판하기도 하고, 1980년대 중반이후에는 마오사상을 통해 개혁개방의 문제를 비판하기도 한다.

관련 인터넷 사이트가 만들어졌다.
http://www.meworks.net/meworksv2a/meworks/page.aspx?no=39401

by 예술인생 | 2009/09/17 23:12 | 학과공부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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